겸손은 참으로 사랑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을 소개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김 추기경의 가족사를 보면 그의 집안이 얼마나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 김영석은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를 팔며 이곳저곳 떠돌면서도 부모의 독실한 순교 신앙심을 이어나갔다. 1895년 경상도 칠곡의 한 신자촌에 정착한 아버지는 서중하 마르티나와 혼인했다. 김 추기경의 외가도 신앙심이 매우 깊었다. 외할아버지 역시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대구 지역에 신앙을 전파한 분으로, 대구 교회 창립의 밑거름이 된 인물이었다. 외삼촌 또한 수도자도 아니면서 신앙을 위해 평생 동정으로 살아 '서동정'이라 불렸다. 이렇듯 친가와 외가의 뿌리깊은 신앙심 속에서 1922년 봄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김추기경의 삶은 한국 천주교의 발전과 영광을 실현하는 주님의 도구로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옹기장수로 떠돌면서도 깊은 신앙심을 지켜나갔던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 김영석 요셉이 돌아가신 뒤 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는 포목 행상과 옹기를 팔며 집안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등에 짊어진 옹기의 무게만큼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산 아버지와 홀로 8남매를 키우며 세상사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어린 김수환의 가슴엔 부모들이 힘든 삶 속에서도 끝끝내 지키고자 했던 신앙심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어머니는 어린 꼬마 수환에게 버릇처럼 말씀하셨다."너는 커서 신부가 되거라."평범한 삶을 원했던 어린 아이에게 이 말은 늘 마음의 짐이 되곤 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어머니에게 효도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차분하고도 단호한 말씀은 거역하기 힘든 것으로 다가왔다. 군위초등학교에서 5학년을 마친 학생 수환은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에 따라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정에 들어갔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 5학년이 된 수환은 '조선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수신과목 시험문제를 받았다.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한 학생 수환은 이렇게 답안을 작성했다.'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정의 앞에서 굴종할 수 없었던 어린 학생 수환의 결기가 담긴 글이었다. 1941년 일본 도쿄 상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청년 수환은 1944년 1월 학업을 앞두고 학병에 강제징집되어 다음해 1월 지치지마 섬으로 보내졌으며, 해방 후 전범재판 증인으로 1946년 3월 괌으로 갔다가 9월에 일본으로 돌아온 후 1947년 1월 귀국했다. 그리고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편입해 사제의 길로 들어서는 삶을 살게 되었다.
청년 김수환은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편입한 뒤 4년 후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수환이 사제 서품을 앞두고 고른 성구는 시편 51장이었다."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한 평생 착한 목자로 살고자,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성찰하겠다는, 사제로서의 굳은 의지였다.
사제 서품을 받고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사목의 첫발을 내디딘 김신부는 첫 소임지에 대한 애틋함이 많아서인지 생전에 그 시절을 자주 회상하곤 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예사로 넘기지 못한 사제 수환은 고해하러 온 신자들에게 몰래 돈을 나누어주곤 했다.
안동본당에서 사목생활을 한 김 신부는 1953년 4월부터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신부겸 교황청 피데스통신 대구교구 통신원을 겸임했으며, 1955년 5월부터 김천시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서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신부를 겸임했다.
교육자로서 김 신부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웃을 때 코를 벌름거린다 하여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권위와 격식을 내세우지 않고 늘 낮은 자세로 삶을 일관했던 그가 교장 시절 학생들과 장난도 많이 쳐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붙여준 것이었다.
늘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꼈던 김수환 신부는 김천본당을 떠나 1956년 독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한국 천주교가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그리스도교 전통이 깊은 나라에 가서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김 신부는 독일 뮌스터대학원에서 1956년부터 1963년 그리스도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사회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사회학을 접하게 된 김 신부는 이후 교회의 현실참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파수꾼으로서, 지성으로서,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계기가 됐다.
김 신부는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위해 돈을 벌러 이국만리 독일까지 가서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미사와 고해성사때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만 생기면 그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아는 것은 행하라는 지행일치의 삶이었다. 8년간의 유학생활은 김 신부에게 변환기에 있는 세상과 한국에서 사회 속의 교회를 꿈꾸고 실현하게 만들어 주었다.
1964년 귀국한 김수환 신부는 1966년까지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6년 주교 수품을 하면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됐다. 김 신부는 2년 뒤인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하면서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하게 된다.
'시골뜨기 주교'에서 한국 천주교의 중심 인물로 급부상한 김 대주교는 이후 30년동안 격랑의 한국사와 함께 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실현에 큰 영향을 끼쳤고,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가 됐다. 1969년 3월29일 김수환 대주교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선축하해요, 김주교. 아니 김추기경! 교황님이 당신을 추기경으로 임명했어요."
당시 136명의 세계 추기경 가운데 김 추기경은 최연소였다. 게다가 그는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지 꼭 18년 만이었다. 그해 4월 30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바오로 6세의 집전으로 거행된 서임식에서 김 추기경은 한국 교회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했다.
'시골뜨기'에서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위에 오른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의 현실 참여와 인간 존엄, 공동선에 대해 늘 한결같은 입장을 유지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하면서 언급한 취임사에는 신을 향하고, 인간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이 잘 나타나 있다.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공동선을 사회 교리로 삼아야 합니다." 어렵고 질팍한 사회 속으로 들어가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역설이었다.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평생을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그런 신념들을 사목현장에서 하나씩 실천하며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자 노력했다.
절망적인 노동현실과 마주한 노동자들,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빈민들, 산업화와 이농현상에 따라 소외된 농민들, 한 때의 잘못을 뉘우치는 재소자들,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녘동포들을 위해 김 추기경은 기도했다. 그들은 김 추기경의 가까운 이웃이자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갈 이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0년대 정의와 인권을 유린한 유신독재정권에 맞선 '세상의 빛과 소금'이었다. 사회의 지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던 시절 김 추기경은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경계선을 제시하며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국가로 향해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했다.1970년대 격동의 시대를 겪으면서 김추기경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과 맞서야 했다.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됐고 이에 따른 정부의 압력도 거셌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지학순 주교를 비롯해 여러 사제들이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부의 압력 뿐만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숱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김 추기경의 신념은 강했다. 세상에 열려 있는 교회, 세상의 아픔 속으로 찾아들어가는 교회가 그의 신념이었다.1971년 성탄 자정미사에서는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준열히 비판하는 강론을 펼치기도 했다.
1980년 초 '유신 세력 퇴진'과 '계엄 철폐'를 외쳤던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18일 0시. 최규하 대통령은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전국의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날 한국 현대사의 비극 5.18 광주민주화 항쟁이 발생했다. 5월 20일 김 추기경은 윤공희 대주교에게 돈 1천만원을 전달하고 평화 해결과 진실 규명, 그리고 부상자 치료를 당부했다. 그러나 그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시민들과 학생들이 총탄에 맞아 숨지는 급박하고 위중한 상황에 몇 차례 긴급 상임위원회를 열었으나 군부 독재의 총탄은 멈추지 않았다.7월 22일 그는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며'라는 제목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 내용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1996년 2월 8일 김 추기경은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 등과 함께 광주 망월동에 있는 5.18 묘역을 찾았다. 그는 희생자들과 민주 인사들을 위한 위령 기도에서 "광주가 입은 상처와 슬픔을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깊이 수용하고 온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한다면 빛고을이 더욱 빛날 겁입니다."라고 말했다.
1987년 6월 10일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시위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정신적 지주였다. 6.10항쟁으로 국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데 앞장 선 인물 또한 김 추기경이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그 소식을 접한 김 추기경은 분노했다.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로 위장하려던 전두환 군부정권의 거짓은 금세 들통났다.1987년 1월 26일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은 '박종철군 추모와 고문 근절을 위한 인권회복 기구 미사'가 봉헌됐다.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 지학순 주교 등 100여명의 사제단이 공동집전하는 미사였다.김 추기경은 강론에서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 없다,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전두환 독재정권을 꾸짖은 뒤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네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1987년 6월 항쟁 때에도 경찰이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난입하려 하자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987년 6월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이 있었다. 김 추기경은 가만히 눈을 감고 감사기도를 올렸다.
천주교는 1939년 제사금령(禁令)을 철회한 후 제례를 허용하고 있으나 김 추기경이 공식석상에서 절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의아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김 추기경은 "선생은 스승과 같은 분으로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 뵙고 인사드릴 어른인데, 돌아가신 분께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바라는 뜻에서 큰절을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생각은 그처럼 늘 열려 있었다.'훌륭하신 분의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분의 종교가 유교건, 불교건, 참배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리는 다를지언정 구원의 진리는 하나다.'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등지며 살았던 1970~80년대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 언제나 한발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섰고 대화의 통로를 열었다.
1997년 길상사 개원식 때엔 이례적으로 축사를 해주기도 했다. 불교계는 김 추기경의 열린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2000년 김 추기경은 성균관대학교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흔쾌히 받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유교의 예절에 따라 유교의 거봉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여 여섯 번이나 큰절을 하고 술까지 따랐다.
1975년부터 1998년까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남북으로 갈라진 이념적 갈등을 중재하고 민족적 대화합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남북화해협력을 시도했다. 1989년 김 추기경은 북한 측 가톨릭 신자들을 10월 5일부터 8일까지 열린 세계 10억 천주교 신자 영성축제인 '제44차 성체대회'에 초대했으나 성체대회가 끝날 때까지 북한 가톨릭 신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1997년 4월 12일 저녁 김 추기경은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옥수수죽 체험 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만찬은 그가 공동대표로 있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서 '북한동포돕기 옥수수 보내기 제2차 범국민모금'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앞서 3월 17억원 이상을 모금해 북한에 보냈지만 북한의 식량난은 예상보다 심각했었다. 김추기경은 가톨릭을 대표해 옥수수 1만톤에 해당하는 17억원을 약정했다. 사제관에 돌아온 그는 '굶는 동포를 살립시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먼저 풀어야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적개심도 녹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김 추기경은 이와 함께 국수 보내기와 사랑의 옷 보내기 등을 실천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녘 동포들을 위한 사랑의 운동에 앞장섰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세대, 계층, 빈부, 노사, 정파, 인종간 사회갈등을 허물고 화해와 상생의 길을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이었다. 격종에 휩싸였던 한국의 민주화 현장에서 나라의 큰 어른으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됐던 김 추기경은 빈민촌 철거현장과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 노동탄압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늘 함께 했다.
김 추기경의 발걸음은 또 세계로 향해, 필리핀과 미얀마 등 군사독재의 탄압으로 고통받는 세계 곳곳의 빈민과 난민을 찾아 위로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
1989년 서울대교구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면서 '생명 존중과 나눔 실천'이라는 대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헌혈과 헌안 운동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참여를 이끌어 냈고, 국내뿐 아니라 빈곤 국가와 소외된 이웃 지원을 위해 세계 50여 개국을 대상으로 나눔과 생명 운동을 실천해 왔다. 김 추기경은 몸소 헌안운동에 참여해 안구를 기증하기도 했다.
또한 서울 보문동 노동사목센터에 이주사목위원회를 두고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에 따라 우리 사회에 문화적 차이와 의사소통 및 노동 문제로 소외되고 있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그 자녀들이 겪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힘썼다.
김수환 추기경이 꿈꾸었던 세상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덜 배웠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에게 인간은 그 자체로 귀하고 존엄한 존재였다. 추기경이 된 이후 그는 그런 신념을 사목현장에서 하나씩 실천해 나갔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지행일치의 삶은 더욱 견고해졌다. 김 추기경은 특히 철거민들을 자주 찾아다녔다. 빈민운동의 대부라 불리는 고 제정구 의원과 정일우 신부에게는 양심선언 문에 보증을 해주기도 했다.갈 곳을 잃은 많은 철거민들을 위해 독일 지원단체를 소개해 주기도 하고 행정당국에 편의를 부탁해 이주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1987년 서울 상계동 철거촌을 찾은 김 추기경은 철거민들에게 말했다."제가 여러분의 발을 씻겨주어도 괜찮겠습니까?"김 추기경은 그렇듯 늘 낮은 자세의 삶을, 도시빈민과 사회적 약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삶을 살았다.2007년 5월 30일 동성고 개교 100주년 기념 미술전시에 참석한 김 추기경은 평범하면서도 순박한 얼굴을 하나 그려놓고 그 밑에 '바보야'라고 썼다. 후배들이 웃으며 왜 바보라고 썼냐고 묻자 대답했다."내가 사실은 바보야.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걸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그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바보 성자'라 불렀다.
시대의 양심이자 예언자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현대사의 고비 때마다 올곧은 종교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했으며,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세상을 단절시키는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용서와 화합'의 사회가 되기를 늘 염원했다. 김 추기경은 2009년 2월, 87세의 일기로 선종하면서 자신의 각막을 기증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생명나눔을 실천했다. 2009년 2월 16일 폐렴 증세가 급격히 악화된 김 추기경은 문병 온 신부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후 6시 12분 김 추기경은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돌려드렸다. 향년 87세, 명동성당 종탑에는 뎅그렁 열 번의 조종이 울렸다.
또한 서슬퍼런 독재정권 시절 억압받던 분들의 인권을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의연한 모습과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았던 김 추기경님의 진솔한 모습도 담겨 이습니다. 이번 사진전을 통하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김 추기경님의 사랑과 발자취를 느껴보세요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 개관을 맞아 첫 기획전으로 사진으로 보는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생애를 돌아보는 사진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를 마련하였습니다. 성장기와 사제 수업을 받던 학생 시절의 모습부터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